황화진 목사

수원에 있는‘강은교회’를 섬기시며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수원서부경찰서 경목위원장으로 경찰선교에 깊은 관심으로 함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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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고학년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지나가는 말로 나보고 글짓기를 잘한다는 식으로 혼잣말 비슷하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중3 때는 학교에서 교지 만드는데 작품을 냈지만 교지가 발행이 되지 않아 많이 아쉬웠다. 고등학교 때는 간혹 산문 장르의 글을 월간잡지 등에 기고하게 되었다. 지금은 컴퓨터의 상용화로 활자화 된 문서를 전 국민이 다 활용하고 있지만 70년대에 내가 쓴 글이 활자로 책에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흥분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간간히 글을 쓰다가 1999년도에 수필부문 수원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주로 교계신문이나 각종 언론지에 자주 기고를 하면서 뒤늦게 관련 부문에 상을 받기도 했다. 국문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수필가로 공식적인 등단 절차를 거쳤다. 그 후 시인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었지만 정식으로 배운 게 없다보니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쓰는 글에 시성[詩性]을 발견한 어느 잡지사로부터 시인 등단을 안 했으면 작품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매우 함량 미달의 작품인데 심사위원들이 격려 차원에서 당선작으로 뽑아줘서 시인 명부에 이름을 올려 늦깎이 시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시를 쓴다기보다는 그냥 산문 형태의 글을 쓰는데 거기에 시적인 표현이 더러 있을 뿐이지 딱히 시를 쓴다는 것은 감히 말을 못한다.

그 다음은 음악에 관련한 이야기이다. 내가 중2 때 쯤 동네 형이 기타를 치는데 굉장한 호기심이 생겨 슬쩍 슬쩍 어깨 너머로 배웠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는 제법 치는 솜씨가 되어서 소위 딴따라 비슷한 데를 기웃거리면서 어설픈 기타리스트 노릇을 하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집이 교회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가서 전도 받아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교회에는 낡은 풍금이 있었는데 그래도 거기서 나오는 소리가 매우 신기해서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만한 여건은 전혀 되질 않았다. 결국 혼자 대충 엉터리로 익히게 되었다.

교회에 나가면서 찬송가를 배울 요량으로 늘 기타를 가지고 찬양을 했는데 어느 날 새로운 악상이 떠올라 찬송가를 참고하여 노래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음악 실력이 더 없을 때라 오선지에 악보를 그리지 못해 계속 외워서 부르다 늦게서야 겨우 악보를 만들었다. 그 때가 고1 때 쯤 되었을 것인데 그 때 작곡한 노래가 열댓 곡 쯤 된다. 그 중 한 곡은 80년대 중반에 한 가스펠 가수에 의해서 음반이 나왔고 대한민국 최대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는 내가 작곡한 노래를 관현악 연주곡으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그 후 나는 목회에 전념하다보니 작곡하는 일은 새카맣게 잊고 살았는데 최근 악상이 또 떠올라 찬양곡도 만들고 더욱이 금번에는 트로트 열풍 때문인지 트로트 곡이 머리에 떠올라 음을 만들고 정리하여 “당신은 최고”라는 제목의 노래를 트로트로는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역시 악보 그리는데 내가 좀 둔해서 조유호 목사한테 그려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분이 보고 노래가 범상치 않다고 기획사를 추천해 줬다.

그리고 저작권 등록 관계로 동영상을 제작해야 하는데 내가 노래 실력이 부족해서 이 형사한테 “부인보고 내 노래 좀 같이 부를 수 있겠나 물어보라”고 했더니 김혜영 집사가 흔쾌히 응해 줘서 너무 감사했다. 그간 내가 작곡한 노래 20여 곡은 모두 저작권 등록을 마쳤다. 요번에 만든 “당신은 최고” 이 노래는 지금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데 하루가 다르게 조회수가 올라가고 있다. 내가 쓴 곡이지만 들어서 경쾌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그리고 이걸 색소폰 연주로 함께 해 준 몇 분에게도 감사한다. 이 노래가 앞으로 어떻게 쓰여 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은혜가 되니 좋고 반응도 좋아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실지 일말의 기대도 있다. 나는 돌팔이 작가에다가 음악을 모르는 작곡가로 비전공자인데 그래도 하나님 일에 쓰임 받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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