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철 목사

경북⋅울산 지방경찰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단법인 경찰선교회 대표로 15만 대한민국 경찰복음화에 앞장서고 있다.

“바벨론 강가에서 우린 앉아있었죠. 우리들은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답니다. 침략자들이 우리를 끌고 와서 노래를 하래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방의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어요. 주여 우리가 하는 말과 마음의 소원을 오늘 밤 들어 주옵소서” 슬픈 가사의 이 노래는 자메이카 출신의 흑인4인조 그룹“보니엠”이 불러 1978년도에 히트시킨 노래다. 가사 내용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포로의 애환을 그린 것으로 성경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출애굽”과 “바벨론 유수(幽囚)”라고 말할 수 있다. 출애굽사건은 정치적으로는 애굽의 노예에서 탈출하여 자유민이 된 것이고, 신앙적으로는 언약의 백성으로서 야훼 신앙이 태동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시기는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전이 훼파되고 왕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의 모든 지도자와 백성과 용사, 장인, 대장장이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예루살렘에는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을 정도로 정치 경제적으로는 암울한 시기였으나, 신학적으로는 야훼신앙 형성이 마무리되는 시기였다. 선지자들의 예언활동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이며, 히브리인들이 암울한 시기를 어떻게 신학적으로 응답, 극복, 승화시켜 나가는가를 볼 수 있는 전화위복의 창조적 시간이었다.

B.C 586년 남유다 멸망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우방은 애굽이었다.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뒤에도 남유다 왕국은 애굽의 보호로 왕조를 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신흥 바벨론이 애굽을 대파함으로써 바벨론의 힘으로부터 왕조를 보호받기에 애굽의 힘은 너무 미약했다. 스물한 살에 즉위하여 11년간을 다스리던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국제 질서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선왕이 맺은 바벨론과의 맹약을 깨뜨리고 친 애굽 외교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실책을 범했다. 약소국가의 반역은 대제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신속하게 팔레스타인에 불러들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바벨론의 군대가 2년여에 걸친 포위 끝에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함락되었다. 느부갓네살왕은 시드기야왕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내고 놋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남유다의 멸망으로 불가침 신앙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축복의 상징인 다윗왕조의 종말, 약속의 땅 가나안의 상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70년 포로생활 등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들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정치적 위기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심각한 신앙의 위기였다.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는 유사한 점이 많다. 첫째,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아프리카 대륙을 잇는 팔레스타인과 시나이반도의 좁고 긴 회랑지대에 위치하며, 우리는 중국대륙과 섬나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한 반도 국가이다. 두 번째는 두 나라 모두 주변의 제국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고, 나라를 잃고 민족이 흩어지는 아픔을 공유하고 있으며, 지금도 어디에서 총성이 날지 모르는 전쟁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나라이다. 이런 지정학적인 특징으로 두 나라는 자체 힘이 왕성하거나 외교력이 뛰어날 때면 주변 제국의 균형자 역할을 하며 국부를 극대화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나라가 침탈될 위험이 상존한다. 때문에 국가 지도자의 거시적 통찰력과 지혜로운 외교, 국민의 통합된 힘이 절실한 나라들이다. 바벨론 강가에서 눈물의 애가(哀歌)를 부르지 않으려면, 정직하고 능력과 덕망을 갖춘 지도자를 세움이 중요한 일임을 알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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