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규집사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21년 서울경찰선교연합회 회장으로 서울경찰 선교현장에서 함께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경찰청 성북경찰서장으로 지역주민을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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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언 30: 8-9)

풍요의 시대다.

마트에 가득 쌓여있는 과일은 계절을 잊은지 오래고, 휘황찬란한 도시의 불빛은 전기세 많이 나올까 벽을 뚫어 형광등 불빛을 나누던 시절을 저 멀리 밀어냈다. 이제 세상은 어딜 가도 모든 게 넘쳐난다. 이러한 풍요로움 속에 잠언의 기자가 걱정했던 것처럼 세상이 풍요롭고 모두가 아쉬울 게 없어지니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무섭다.

책장마다 성경책은 흔하고 종류별로 가지고 있다. 그마저 무거워 스마트폰을 켜면 성경은 물론이고 찬송가도 즉시 플레이가 가능하다. 교회는 어떠한가? 길만 건너면 서너 곳이 한눈에 보이고,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주 놓친 설교는 물론 유명한 목사님의 좋은 말씀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성경도 교회도 말씀도 배가 부를 정도로 많고 흔하다.

풍요는 (물론) 축복이지만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모두가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우고 대규모 합동 세례를 하던 구약시대 같은 그 시절은 흑백사진처럼 까마득하다. 전도자의 발길이 닿아야만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지역은 지도상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사람을 만나 말씀을 전하던 방식은 사람들의 풍요로운 권리와 목소리 속에서 더이상 먹히지를 않는다. 풍요의 시대에 전도를 생각한다. 고민해 봐도 정해진 답은 없어 보인다.

성인이 된 후 하나님을 알게 된 나를 기독교인으로 이끈 것은 길거리 전도도 아니었고 심령부흥회도 아니었다. 나는 오랫동안 봐온 이웃 노부부의 제안으로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나를 교회에 이끈 것은 그들의 선하고 모범적인 삶이었다. 그들은 교회를 나가는 것에 그리고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에 호들갑스럽지도 않았고 과장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항상 먼저 손 내미는 모범적인 생활인이었다. 교회 사람들하고만 어울린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세상 것에 결코 휩쓸리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의 모든 행동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였고 그들의 모든 행동은 성경이 기준이 되었다. 이들의 닮고 싶고 본받고 싶은 삶은 동력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풍요롭지만 마음은 빈곤하고 수없이 많은 정보와 소통이 존재하지만 외로움은 커져가는 이 때, 나는 기독교인들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한 전도의 방식이라고 믿는다. 더 오래 걸리고 덜 확실해 보여도 조용히 스며드는 이 방식이 나는 좋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때로 나조차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알려주려고만 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우리가 이룬 풍요와 기술의 발전은 많은 것을 편하게 만들었지만 우리는 예전보다 더 바빠지고 더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해 늘 불안하다. 물질적으로는 배가 부르지만 정신적으로는 늘 가난하다. 풍요롭지만 오히려 가난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모른다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생활을 통해 우리 안의 하나님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 오직 필요한 양식만으로도 충만한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귀하디 귀한 영혼 하나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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